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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 디비질 때마다 독재정권 끝장나
[특별기고] ‘혁명의 종결자’ 내 고향(PK) 지인들에게 부칩니다
 
정운현기자 기사입력  2012/12/14 [07:58]
(한국 현대사에서 부산-마산지역은 '혁명의 종결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 출신의 블로거 '구봉이'(redpeng) 님이 과거 대선에서 부산-마산 지역의 역할론을 짚어보고 올 대선에서 이 지역에 거는 기대를 담은 글을 보내와 소개합니다. 필자는 부산 출신으로 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대를 졸업했습니다. 필자는 이 글을 고향사람들에게 보내는 간절한 편지라고 밝혀왔습니다...편집자)

1. ‘혁명의 종결자’ PK지역  
나는 역사공부를 수십 년 동안 업으로 해왔다. 그런데 공부 과정에서 부산과 마산이 디비질 때마다 독재정권이 끝장났다는 사실을 오래 전에 발견했다.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에 조종을 울린 것은 1960년 4월혁명, 1979년 10월 부마항쟁, 1987년 6월항쟁이다. 이들 혁명 과정에서 부산 울산 경남(편의상 PK로 칭함) 지역은 터미네이터 역할을 감당했다. 
가) 마산시위와 이승만 독재의 종말 
4월혁명의 계기는 1960년 3.15 대선이다. 자유당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이기붕이었다. 이승만은 1875년생으로 당시 86세의 고령이었다(이런 노인을 다시 대통령으로 뽑겠다니). 마침 야당인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이 미국 육군병원에 치료 받으러 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왔다. 야당 후보가 사망함에 따라 자유당으로서는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이 절실했다. 당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는 러닝메이트 제도가 아니었다.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은 승계 1순위였다. 
그 이전 선거인 1956년 대선에서 부통령에 이기붕이 낙선하고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 당시 이기붕은 죽을병에 걸려 거동조차 불편했고 유세조차 못했다. 이런 지경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시도되었다. 이것이 소위 ‘3.15 부정선거’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선거에 대구의 ‘2.28데모’ 등 고등학생을 중심한 산발적 저항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선거 당일 드디어 마산에서 부정선거 반대시위가 터져 나왔다. 마산은 선거 당일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이 있었던 유일한 곳이었다. 
경찰 발포로 여러 명이 사망했고 시위는 격렬했다. 이에 부정선거 주범격인 내무장관 최인규가 교체되고(법무장관이던 홍진기-홍석현 아버지-가 내무장관이 되었다. 4.19 경찰 발포의 최종 책임자로 이후 재판을 받게 되었다), 국회 조사단이 파견되는 등 수습책이 모색되고 있었다.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

이런 와중에 4월 11일, 시위 과정에서 실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다시 마산 시민들은 격렬하게 시위했다. 한편 시신의 처참한 모습은 <부산일보>의 사진 제공을 통해 중앙지에도 대대적으로 그대로 보도되었다(김지태의 부산일보에서 현재 박근혜의 부산일보로 바뀌었다). 부산일보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그런 편법을 취했다. 
마산의 3.15시위와 4.11시위가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산의 3.15시위는 물론 4.11시위가 없었다면 4.19혁명은 없었을 것이다. <부산일보> 등 현지 언론이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일조했다. 이와 같이 마산과 부산 사람들은 유달리 정의감이 강했고 용감했다.  
나) 부마항쟁과 박정희 독재의 종말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격으로 죽었다. 김재규의 주장을 빌려 말하자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던 것은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서였다. 결국 10.26사건의 직접적 계기는 부마항쟁이었던 셈이다. 
유신체제하에서 특히 긴급조치(현재는 위헌 판정을 받았지만)하에서 탄압은 극단적이었고 저항은 어려웠다. 민청학련 관련 학생들이 군법회의를 받아야 했고 사형 선고를 받던 시절이었다. 인혁당 관련자 8명은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날 사형이 전격 집행되었다.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데는 대학생으로서의 기득권 포기는 물론 구속 나아가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샌님 같은 외모의 문재인에게서 의외의 헌신과 결기를 엿보게 된다. 인혁당 관계자들이 전격 사형당한 바로 다음날인 1975년 4월 10일에 문재인은 데모를 주동하다 제적, 구속되었다. 나는 감히 유신체제에 앞장서 저항할 용기가 없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가에서 그나마 저항이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서울대에서도 한 해에 한 번 정도의 학내 시위가 있을 정도였다. 부산대는 몇 년 동안 유신반대 시위가 없었고 ‘유신대학’이라는 오명을 들을 정도였다. 이화여대생이 남성 성기를 자르는 그림을 부산대학교에 보내 그 비겁함을 조롱했다는 설이 나돌 정도였다. 그런 부산대 학생들이 드디어 10월 16일 분연히 일어났다. 부산의 시위는 곧 마산 경남대 학생들의 주도하에 마산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부산 마산의 대학생들은 학내시위를 넘어 가두로 진출했다. 시민들이 가세하며 격렬하게 그리고 며칠 동안 지속되었다. 부산 마산 시위는 긴급조치 이래 그 양상이나 규모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찰력으로 시위를 막을 수 없게 되자 부산에 계엄령,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이 비상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유신체제는 끝장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유신대학’이라는 오명을 듣던 부산대학에서 그리고 박정희의 경호실장을 지냈던 박종규(일명 피스톨 박) 소유의 경남대학 학생들로부터 시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학생들의 주동에 시민들이 적극 동조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은 내가 PK 지역의 보수성과 무기력에 번번이 절망하면서도, 그들의 DNA속에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혁명적 에네르기’에 기대를 걸어보게 하다. 
부마항쟁에 참여했고 또 그날의 감동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부마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저평가되고 있다. 이점은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에 대한 세간의 인식과 평가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해당지역 사람들이 스스로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유신체제를 피 흘리며 붕괴시키는 위업을 이루었는데, 이제 와서 그 딸의 인질이 되는 역설이라니. 이보다 더한 병신이 따로 없다.

 6월항쟁 당시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부산본부 소속 회원들의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 세번째가 문재인 변호사
  
다) 6월항쟁과 전두환 독재의 종말
1987년 6월항쟁은 전두환 독재정권을 끝장냈다. 항쟁의 지도부는 ‘국민운동본부’였다. 그런데 서울에서 국민운동본부의 건설이 논의 단계인 5월 20일, 부산에서는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가 결성되었다. 본부가 결성되기도 전에 부산지부가 먼저 결성되는 기이한 양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부산본부에서 노무현은 유일한 상임집행위원장이었고 문재인은 16명 상임집행위원 중 일원이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김무성은 9월 23일, 노무현이 6월항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거리낌 없이 지껄였다.
서울에서 시위가 주춤할 즈음, 부산의 명동성당 격인 카톨릭센터 농성(16-23일)은 부산지역을 넘어 전국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6월항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된 시위였다. 지방 중에서도 부산 마산지역 시위가 유달리 격렬했고 다수의 시위 참가를 기록했다. 그리고 6월항쟁에 이은 7-8월의 노동대투쟁 과정에서도 PK지역은 돋보였다. 대규모 사업장과 중공업이 밀집한 울산 창원 등지에서 거대한 중기를 앞세운 노동자 시위는 섬뜩할 정도였다(그즈음 문재인은 노동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그 부분에서 문재인은 독보적 존재였다). 
2. 김영삼의 일탈과 그의 딜레마 
이러한 PK지역의 혁명적 전통은 김영삼의 ‘일탈’로 단절되었다. 부마항쟁과 부산의 6월항쟁 배후에는 김영삼이란 걸출한 민주화 지도자가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1990년 1월에 ‘3당합당’을 감행했다. 그는 이승만의 사사오입개헌에 반대하여 자유당 탈당을 감행했다. 5.16쿠데타 직후에도 공화당 참여 유혹을 뿌리쳤다. 60년대 말에 ‘40대기수론’을 주창하여 야당 지도력을 혁신했다, 70년대에는 야당 당수로서 유신체제에 대한 강경 투쟁을 주도하다가 야당 당수직은 물론 국회의원직마저 잃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여 단식투쟁하며 반독재투쟁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에 일관되게 저항하던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기수 김영삼은 독재권력에 결국 투항하고 말았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치던 민주투사 김영삼으로부터의 일탈이었다. 명분 없는 3당합당에 노무현이 ‘이의가 있다’며 정치적 은인인 김영삼의 일탈에 외롭게 저항했을 뿐, PK지역은 김영삼의 일탈과 함께 추락하고 말았다. 

 '3당합당' 선언 후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영삼(왼쪽)

김영삼의 일탈은 그에게 대통령이 되는 개인적 영광을 안겨주었다. 하나회를 과감히 척결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기반인 PK를 TK의 식민지로 전락시켰으며 보수 절대 우위의 기형적 정치지형을 초래하고 말았다. 여태껏 김영삼과 PK에게 이명박 그리고 박근혜는 ‘남이 아니다’. 김영삼과 PK는 이명박에게 이용당했고 이제는 박근혜에게 이용당할 지경에 처했다. 그런데 이제 내부 균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박근혜와 경쟁 대립하던 이명박은 김영삼과 PK지역을 활용하여 박근혜를 고립시키려 했다. 그리고 민주투사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김영삼도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보다는 이명박으로 기울었다. 최근 박근혜가 주도한 4.11 총선에서 김현철의 공천이 무산되자, 김영삼은 박근혜를 ‘칠푼이’라 악평하고 ‘박근혜에게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김영삼은 박근혜 지지로 기우는 듯했다. 그의 화끈한 성격과 달리 미지근하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박근혜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 측근이던 김덕룡 등이 이례적으로 문재인 지지를 표명하고, 양자 박빙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그의 딜레마는 더해지고 있다.
그 딜레마의 근원은 민주투사로서의 김영삼과 보수권력 창출의 공로자(공범자?)라는 양면성 때문이다. 대체로 후자가 우세한 가운데, 이율배반적인 양 측면이 공존할 수 있었지만,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 때문에 그 딜레마의 정도가 예전과 다르다. 물론 그의 아들의 정치적 진출 문제도 관련돼 있을 것이다.
‘남민전사건’으로 박정희에게 죽을 뻔 했던 이재오가 박근혜에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결국에는 박근혜 당선을 위해 나섰다. 김덕룡과 이재오는 결국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그 딜레마의 근원은 김영삼의 그것과 같은 것이다.  
3, 김무성의 발탁과 보수대연합 전략  
주지하듯이 김무성은 ‘친박’의 2인자였다. 그는 친박이라는 이유로 총선 공천도 받지 못할 정도로 친이계의 보복을 당했다. 전형적 경상도 마초 스타일이나 김영삼과의 밀접한 관계로 미루어 보건데 박근혜와 궁합이 맞지 않다. 그가 친박 진영에 가담한 것은 의외였다. 역시나 김무성은 박근혜에게 차이고 친이계로 변신했다.
그의 아버지(김용주, 박정희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음)가 포항에서 학교와 사업체를 운영했고 어려서 포항에 살았고 또 포항에서 사업체를 운영했던 적이 있다. 이런 사정으로 김무성은 ‘영포회’의 명예회원이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명박과 김영삼의 우호적 관계 등을 고려하면 김무성이 친이계로 변신한 것은 자연스럽다. 

 영포회 명부. 오른쪽 가운데 김무성의 이름이 보인다 

그런데 김무성은 박근혜가 주도한 4.11 총선에서 다시 물먹었다. 친박이라는 이유로, 또 친이(혹은 배신자)라는 이유로 총선에서 연거푸 공천을 받지 못하는 기이한 경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김무성의 거취가 ‘친이연대’(‘친박연대’의 복사판) 형성 가능성의 시금석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김무성의 선택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의 거취는 총선은 물론 박근혜의 대선 전략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캠프 진용이 위기에 처하자, 김무성을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으로 임명했다. 그 직함에 관계없이 김무성은 대선을 총괄하는 야전사령관직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김무성의 홈페이지 메인 화면은 오래 전부터 ‘종북좌파 집권 저지’ ‘백의종군’ 등의 큼지막한 글씨로 도배되었다(지금까지도). 그의 이러한 처신과 발언은 지난날의 수모들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에게 다시 충성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신호였다. 
박근혜는 그녀의 아버지를 배신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런 뼈아픈 경험들 때문에 배신자에 대해서는 철저한 편이다. 따라서 배신자 김무성을 재발탁한 것은 정말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파격적 발탁의 이유를 살펴보면 박근혜 진영 대선전략의 대충을 가늠할 수 있다. 
1) 산토끼보다는 집토끼 잡기를 중심한 보수대연합 전략으로 기울었다. 이러한 전략에 입각하여 올드 보이들이 대거 결집하고 있다. 친박 친이를 넘나들었던 김무성이 총괄본부장으로 임명되면서 실제로 친이계도 대거 전면에 포진되었다.  
임기말 레임덕이라지만 이명박은 유력한 수단들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이명박은 KBS와 MBC 사장에 고대 후배인 길환영과 김재철을 배치했다. 박근혜는 ‘이명박근혜’식의 정권심판론이 제기될 위험을 감수했다. 대통령과의 차별화 전략을 취했던 이회창과 정동영이 범했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을 절대 거부했던 이명박도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한 것 같다. TV화면에서 그의 얼굴을 본지 오래다.  
2) 김무성이 PK출신이라는 점이다. PK지역은 박근혜에게 집토끼이고 텃밭이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모두 부산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PK 지역의 득표율은 대선의 승패를 가르는 변수이다. 김무성을 통해 김영삼의 미지근한 지지라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김영삼이 ‘박근혜의 숨겨진 자식’을 공공연하게 말했지만, 박근혜 측은 그 민감한 발언에 대해서도 법적으로 대응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  
3) 네가티브 진흙탕 싸움으로 몰고 가서 투표율을 낮추어 고정표로 승부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무성은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한다. 김무성의 막말 수준은 김영삼의 그것보다 훨씬 더한 것 같다. 
4) 김무성이 민추협 등 민주화운동 경력자이다. 김무성은 자기들이 민주화운동의 적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노무현이 6월항쟁과 관련이 없다는 허무맹랑한 발언을 했었다. 잊혀진 존재이던 김중태와 김대중의 측근(한화갑, 한광옥)등을 끌어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근헤의 ‘독재자의 딸’이라는 태생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김대중의 측근들을 끌어들인 것은 호남의 이탈표를 부수적으로 노린 것이다. 
5) 김무성의 장악력과 저돌적인 추진력을 높이 샀다. 실제로 그는 총괄본부장에 임명되자마자 사무실에 야전 침대를 가져다 두고 야전사령관으로서 호령했다. 이외에도 김무성 집안의 재력과 화려한 인맥관계도 발탁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미디어오늘’ 기사 참조).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507  
4. PK지역 혁명전통의 부활을 기대하며 - ‘9회말 역전’ 
PK지역의 혁명 전통은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지고 단절되었다. ‘우리가 남이가’ 식의 지역투표만 존재했다. 노무현은 한 명의 청중도 없는 텅빈 곳에서 유세해야 했고(그 황량한 곳이 바로, 농사지은 채소를 어머니가 리어카에 싣고 팔러갈 적에 자주 따라갔던 시장터임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에게 거듭 낙선의 좌절을 안겨주었다. 노무현이 부산 사람이었지만 노무현 정권을 자기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4.11총선에서 민주당의 지역색이 대폭 탈색되었지만 정도는 덜했지만 여전했다. 지역투표는 본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보수 집권을 영속하게 했다. 정치는 물론 사회 발전을 가로막았다.  
박근혜 측이 보수대연합, 낮은 투표율, 고정표로 승부하겠다는 시대착오적 전략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PK지역의 충성도를 여전히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PK지역은 전체 유권자의 15.8%(부산 7.2% + 울산 2.2% + 경남 6.4%)로 수도권을 제외하면 가장 다수이다. 물론 박근혜 전략이 적중할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그런데 만약 PK지역 충성도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는 이변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바로 또 하나의 혁명이다. 대선에 영향을 미칠 3대 변수는 지역-계급-세대이다. 이중에서도 핵심 변수는 ‘PK지역 득표율’과 ‘젊은층 투표율’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이번 대선의 관전 포인트이고 2대혁명 요소일 것이다.  
‘PK 싸나이’의 혁명적 반항적 기질과 전통은 현재 야구장에서만 변형된 형태로 잔존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야구 흥행은 롯데 자이언트의 성적에 좌우된다고 한다. SK팬으로 야구광인 지인의 말에 의하면 특히 마산에서 경기하면 이기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PK의 반항아적 기질은 야구장의 ‘부산갈매기’ 노래 가락과 주황색 봉다리로 잔존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박근혜

외신들마저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17일자 미 시사주간지 <Times>지의 표지는 ‘The Strongman's Daughter’ 였다. 이 기사를 두고 새누리당과 일부 언론은 “강력한 지도자의 딸”로 번역하는 꼼수를 부렸다. 그 해석을 두고 논란이 일자, Times지는 인터넷판에서 ‘Dictator's daughter’라고 구태여 수정했다. 참으로 가관이고 국제적 망신이다.
북한은 3대 세습, 남한은 2대 세습으로 나아가려 한다. 한국 사정에 밝지 않은 외국인에게 한반도는 세습이 만연한 전근대 야만의 땅으로 비칠지 모르겠다. 정권은 물론 재벌, 사학, 언론도 모두 세습체제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권력과 부가 대물림되는 사회로 역행하고 있다. 
최근에 나는 PK 지역의 혁명적 기질과 전통이 되살아날 조짐을 보았다. 이전에는 거리 시위로 혁명을 했었다. 매번 PK 지역이 그 혁명의 ‘종결자’ 역할을 했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제 PK는 ‘종이폭탄’(투표용지)으로 그 종결자 역할을 다시 감당해야 한다.  
이회창이 그랬듯이 박근혜도 오랫동안 대세론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회창은 두 차례 막판 역전패를 당했다. 문재인도 ‘9회말 역전’을 노리고 있다. PK가 바로 역전 홈런을 날리는 종결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추기]
글쓰기를 마치고 공개하려는데 오늘(12일) 오전에 김현철의 트윗이 날아들었다. 김영삼의 딜레마는 ‘박근혜 반대, 문재인 지지’로 일단 정리된 듯하다. 김영삼은 그 아들 김현철을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해왔다. 김현철 트윗에서 ‘민주세력이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기리라 믿습니다’라는 표현은 곧 ‘문재인 지지’라는 의미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의외의 파격적인 지지선언이라 평가할 수 있다. 원죄의 제공자 김영삼으로부터 PK 집토끼와 텃밭은 마침내 균열을 보이고 있다. 김영삼과 PK의 딜레마를 주제로 다룬 아래 글을 살피면 저간의 사정들을 이해할 것으로 믿는다.

/진실의길http://poweroftruth.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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