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0월 유신’ 40주년이 되는 해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 특히 여권에서 먼저 ‘유신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는데, 그 타깃은 바로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이다. 그 이유는 박근혜 의원이 1972년 ‘10월 유신’을 강행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기 때문이다. 박 의원을 두고 ‘독재자의 딸’ ‘유신 공주’ 같은 불명예 딱지가 붙은 것도 바로 여기서 연유한 것이다.
박근혜의 ‘유신 책임론’을 먼저 치고 나온 사람은 새누리당 대통령선거 경선 후보인 이재오 의원. 이재오는 박근혜를 향해 “유신 통치의 장본인”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재오는 지난 18일 <이데일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박근혜 의원은 단순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보면 안된다”며 “그는 청와대 (시절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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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자리에 모인 박정희 대통령 가족들. 1960년대 중반경으로 추정된다. |
박근혜를 두고 ‘독재자의 딸’이라고 하는 것은 ‘연좌제’일 수 있다는 세간의 지적에 대해 기자가 언급하자 이재오는 “한 마디로 우물안식 사고”라고 일축하고는 “박 의원은 유신 시절 핵심(시기)에 청와대 안주인으로 생활했다”며 “당시 나이도 어리지 않아 20세를 훌쩍 넘었던 시절이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박근혜는 실지로 ‘청와대 안주인’ 노릇을 한 적이 있는가?
적어도 1970년대에 성인이었던 세대라면 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당시 TV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큰 영애’ 박근혜가 나란히 등장한 모습이 너무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섰던 그 자리는 원래 육영수 여사의 자리였다. 그러나 1974년 8월 15일, 이른바 ‘문세광 저격사건’으로 육 여사가 졸지에 서거하자 그 빈자리를 딸인 박근혜가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박근혜가 어머니를 제치고 ‘청와대 안주인’ 노릇을 한 건 분명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머니 육 여사의 빈자리를 채운 셈이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박근혜는 영락없는 ‘영부인’ 행세를 했다. 부부동반의 외교사절 모임은 물론 박 대통령의 각종 행사나 현지시찰 때도 심심찮게 동행했다. 대통령 딸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대통령 부인 직무대행’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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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터 미국 대통령 가족과 기념촬영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76. 6월) © 정부기록사진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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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군사관학교 27기 졸업식에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참석한 박근혜 (1979. 4.4) © 정부기록사진집 | 물론 박 대통령이 재혼을 하지 않은 이상 누군가 영부인 역할을 해야만 했다면 ‘딸’인 그가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을 수도 있다. 당시로선 그것이 특별히 흠이 되거나 또 탓하는 사람도 없었다. 74년 서강대 전자공학과 졸업 후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육 여사 서거 소식을 듣고 귀국한 박근혜는 이후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웠는데 혹자는 이를 두고 ‘착한 딸’로 여겼을 수도 있다.
문제는 박근혜가 영부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 때문이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소위 ‘10월 유신’을 공포했는데, 이는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헌법적 비상조치였다. 유신체제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대통령 간선제, 국회의 권한 축소, 인권 및 언론탄압 등 전형적인 독재체제였고, 그로인해 박정희는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을 맞고 결국 비명에 생을 마감하게 됐다.
74년 8월 육 여사 서거 후부터 1979년 ‘10.26사건’까지의 기간은 5년 남짓한데 현행 ‘5년 단임제 대통령’으로 치면 박근혜는 영부인 한 사람 몫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청와대 안주인 노릇을 한 셈이다. 그것도 부친 박정희 대통령이 역사적으로 가장 지탄받는 기간 동안에. 그러니 그에게 ‘유신 책임론’이 제기되는 것은 응당하다 할 것이다. 만약 이런 걸 부인한다면 ‘청와대 안주인’으로서 누를 것은 다 누려놓고 책임은 모르쇠 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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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국여성봉사단 발단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는 박근혜. (1976. 4. 28) © 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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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가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임명장도 주고 정치적 행위를 했다. 나이가 어리지도 않아 20살 훨씬 넘었는데 유신통치의 장본인이다.”고 했는데 이 말도 크게 틀려 보이지 않는다. 1974년, 만 22세에 뜻하지 않게 ‘청와대 안주인’이 된 박근혜는 76년 구국여성봉사단 발단식 같은 행사에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대통령 딸’로서는 갈 자리가 아니다. 응당 ‘영부인’ 몫으로 간 것이다.
이재오가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주장을 펴자 박근혜의 한 핵심 측근은 “그러니까 (이 의원) 지지율이 1%도 안 나오는 것 아니냐”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물론 이재오가 이런 말을 한 데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말하자면 당내의 힘겨운 상대랄 수 있는 박근혜의 ‘흠집내기’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에겐 ‘원죄’와도 같은 ‘박정희 딸’이라는 딱지가 떼어지는 건 아니다.
이런 호재를 야당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민주통합당은 이재오를 편들고 나섰다. 정진우 민주당 부대변인 이날 논평을 통해 “박 의원은 1974년부터 1979년 박정희가 죽을 때 까지 만 5년 넘게 철권통치자 박정희에 이은 2인자의 신분을 누렸던 장본인이다. 박정희 시대의 퍼스트레이디는 민주 정부의 영부인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자리”라며 이재오 말이 맞다고 편들고 나섰다.
정 부대변인은 “따지자면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보다도 힘이 셌고, 심지어는 영원한 2인자로 불리는 김종필보다도 위에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어찌 보면 김종필은 영원한 2인자가 아니라 영원한 3인자였던 셈”이라며 “박 의원은 유신잔당이 아니라, 권력서열 2인자였던 유신본당”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박근혜의 위상이 실지로 어느 정도였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부친 박정희 대통령 말고는 그를 당할 자가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경제건설이 박정희 대통령의 ‘공(功)’ 가운데 하나라면 ‘유신’은 그의 ‘과(過)’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는 그 둘 가운데 ‘공(功)’만을 골라서 취할 수는 없다. 응당 ‘과(過)’도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폭로닷컴 http://www.pokr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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