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필립, 그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영원한 박정희家의 집사란 별칭이 붙어 있다. 그는 또 원조친박의 보이지 않는 구심점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생애가 박정희-박근혜와 뗄 수 없는 관계 때문이다. 그런 최필립이 사망했다.
최필립은 1928년생으로 평양고보를 나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외무부 공무원으로 출발, 유신 후 청와대에 입성했다. 이후 육영수가 사망한 뒤부터 박정희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박정희가의 소소한 일을 책임지는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박근혜가 정수장학회 이사장 직을 물러난 뒤 그 직을 이어받아 금년 2월까지 수행했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박근혜의 수족으로 생활했다는 거다.
작년 대선무렵, mbc이진숙과 mbc민영화를 논의한 녹취록이 보도되어 세간을 시끄럽게 하고 그 때문에 결국 물러났지만 이후로도 정수장학회=최필립 등식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때문에 실상 원조친박계의 '보스'로서 뒤에서 보이지않는 정치를 했다.
숨은 비하인드 스토리로는 삼성동 박근혜 자택에 검문없이 자동차로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그렇기에 박근혜에게 쓴소리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각종 현안에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두 사람이 큰소리로 싸우기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박근혜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이란 얘기다. 이는 박근혜가 '친서'로 유가족을 위로했다는 뉴스로 확인된다.
그가 죽었다. 향년 86세다. 그런데 이는 우리 정국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건이다. 20대 후반에 부모를 모두 잃은 박근혜가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인물을 잃었으니 이제 정말 박근혜에겐 터놓고 얘기할만한 사람도, 과속을 제어해 줄 멘토도 없다. 따라서 남은 4년은 박근혜와 7인회의 '통치'만 횡횡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러면 그 7인회가 무엇인지, 7인회의 면면은 어떤지를 살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살필수록 앞날이 막연하다. 그들의 면면이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사람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김용환 : 박정희 유신정권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을 거쳐 재무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숙정'되었다가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충남 보령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3당합당으로 민자당 소속으로 내리 3선을 하므로 4선 중진이 되었다. DJP연합 당시 핵심적 역할을 했으나 자민련을 자진탈당, 2001년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이회창 멘토를 했다. 2007년 후 친박으로 활동하며 박근혜에게 신뢰를 받았고 그 신뢰는 지금도 깊다. 이한구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와 동서지간이다. 박정희 사람으로 김종필 김대중까지 섭렵, 전두환시절을 빼고는 권력의 그늘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는 권력 해바라기다.
최병렬 : 유신 시대 조선일보 정치부장을 지냈고 5공 출범 직후 편집국장을 거쳐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투신했다. 청와대와 정계에서 요직을 거치고 관선 서울시장도 지낸 그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진두지휘한 한나라당 대표였다. 별명이 최틀러다.
안병훈 : 조선일보 기자출신으로 발행인까지 지낸 인물이며, 현재 도서출판 기파랑의 발행인이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냈다. 박근혜와의 인연은 조선일보 청와대 출입기자를 하며 친하게 지내면서 이뤄졌다고 한다.
김기춘 : 현재의 공안정국을 이끌고 있는 핵심으로 지목된 박근혜 비서실장이다. 박정희 시절 중앙정보부 파견 검사로 유신헌법 제정의 실무를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정 대공국장을 역임했다. 1992년 법무부 장관 시절 "우리가 남이가" "영도다리에 빠져죽자"로 유명한 '초원복집 사건'의 핵심이었다.
현경대 : 박정희 시절 공안검사, 5공때 민정당 공천으로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 제주에서 출마 당선된 뒤 내리 5선을 했다. 2004년 낙선했으나 2005년 박근혜 대표 당시 한나라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다. 2007년 대선경선 시 박근혜 외곽 지원조직인 '한강포럼'을 이끌며 친박 핵심으로 활동했으나 2008년 친박학살 공천으로 낙천되자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 낙선했다. 그러나 박근혜가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 한 뒤 복당했고 19대 때 다시 공천을 받았으나 결국 또 낙선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그를 평통 수석부의장(장관급)으로 위촉 계속 신임 중이다.
김용갑 : 육사 17기, 소령으로 예편하여 중정에 투신한 인물이다. 중앙정보부 검찰국장일 때 전두환 쿠데타가 있었으나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영전한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내는 등 전두환의 총애를 받았다. 노태우 때 총무처 장관으로 좌익 척결을 외치며 장관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1996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내리 3선을 했는데, 2000년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여당인 민주당을 가리켜 조선노동당 2중대라고 주장했다.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을 가리켜 대북 퍼주기 정책이라며 강도높게 비판한 인물로 '꼴통'이미지를 확실히 했다.
강창희 : 현 국회의장이다. 육사출신으로 현재 몇 남지 않은 하나회 출신 현역 정치인이다. 대전 출신으로 제11대 민정당 전국구로 당선된 뒤 16대까지 대전에서 내리 4선을 했다. 김종필과 자민련을 함께하기도 했으나 자진탈당,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제17대는 탄핵 역풍으로 낙선, 제18대는 박근혜 지원 유세까지 받았으나 다시 낙선했다. 이런 2번의 낙선 끝에 지난 제19대 총선에서 당선, 6선의원이 되므로 19대 국회의 전반기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로 보면 결국 7인회란 직업관료, 검사, 군인, 언론인 출신들로 다양한 직업군 출신들이 모였으나 박정희-전두환의 은덕으로 노른자위에 있었고, 그 때문에 박근혜를 호위했던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이들의 사고는 대통령은 통치권자이며 그것도 '강압통치'로 국민을 제압해야 한다는 지점에 머물러 있다. 지금 이들을 대표하는 강창희는 국회의장으로 여의도를, 김기춘은 비서실장으로 청와대를 요리하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를 에워싸고 있는 7인회는 실상 최필립이 박근혜에게 미치는 영향력에는 가당치도 않다. 최필립은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의 불편한 관계까지 교통정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죽었다. 이는 한마디로 박근혜에게 단 하나 남은 멘토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위에서 언급한 7인회는 '자기 개인을 위한 충성' 때문에 박근혜가 망하는 길로 가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최필립의 사망은 이제 싸우면서라도 박근혜의 과속을 제어할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지금 SNS에는 박근혜 반대파들이 최필립의 사망에 환호하는 기색까지 보인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최필립은 물론 민중에게 국민에게 역사에게 충성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주군인 박정희-박근혜에게만 충성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의 죽음을 지근에서 목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박근혜의 '독단'과 '독재'가 극단으로 가면 제동을 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광의적으로 보면 그의 죽음은 환호할 일이 아니란 얘기다.
그러므로 나는 최필립의 죽음으로 이제 정말 언론이 제대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론은 위에 언급한 7인회를 더 세밀하게 감시해야 하고 그들이 역사에 반역하려는 기미를 제대로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그런 언론이 있을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암울하다. 최필립의 부음을 들은 지금 '불안한 걱정'이 앞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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