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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전범’ 양칠성이 ‘독립영웅’이 된 사연
[독후평]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 씨, <적도에 지다> 번역 출간
 
정운현기자 기사입력  2012/08/09 [08:04]
▲ <적도에 묻히다>
며칠 전,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 피해자인 김종익(58) 선생이 사무실에 들러 책 한 권을 건네면서 자신이 번역한 책이라고 했다. 서명은 <적도에 묻히다>, ‘독립영웅,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일제하 조선인 군무원들의 삶을 추적해온 일본인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무라이 요시노리(村井吉敬) 교수 부부가 펴낸 <적도하의 조선인 반란>(원제 ‘赤道下の朝鮮人叛亂’)을 번역한 것이었다. 이 책은 이미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바가 있어 필자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 책을 왜 다시 번역해서 출간하게 됐을까? 
책 내용 소개에 앞서 번역자와 저자, 그리고 이들 사이에 얽힌 여러 ‘인연들’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할 필요를 느낀다. 김종익 씨는 국민은행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일찍이 한학과 동양고전에 관심이 깊어 한학자인 청명 임창순(1914~1999) 선생이 세운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김 씨는 또 진보적 역사학술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 멤버로 초창기부터 활동해 왔으며,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런 그가 MB정부 들어 ‘민간인 사찰’로 큰 고통을 겪은 후 역사공부를 하면서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 

작년 7월경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2가에 있는 ‘노동자 역사 한내’를 찾았던 김 씨는 우연히 이곳에서 김경남(49) 일본 호세이대학 교수를 만나게 됐다. 1980년대 대학생 시절 가명으로 위장취업을 해 노동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 김 교수는 국가기록원 연구원으로 일하다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우쓰미 교수와 알게 됐고, 그 인연으로 우쓰미 교수의 저서 <전후보상으로 생각하는 일본과 아시아>를 번역해 출간한 바 있다. 당시 김 교수가 ‘한내’를 찾은 것은 이곳에 가면 한국 노동운동 관련 자료가 잘 정리돼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료 수집차 방문한 것이었다. (실지로 ‘한내’에는 한국 노동운동 자료가 집대성 돼 있다고 한다)  

그 무렵 일본어 자료 번역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김종익 씨는 김 교수에게 번역할만한 책을 하나 소개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김 교수는 우쓰미 교수의 이 책을 권했던 것이다. 이 책은 앞서 두 차례나 국내에 번역된 바 있지만 저자의 동의를 얻지 않은, 이른바 해적판인데다 모두 절판됐다. 원전 초판이 출간된 지 32년만에 정식 한국어판이 나온 셈인데 저자들은 책머리에 감격스런 ‘한국어판 서문’을 실었다. 책 뒷부분에는 김 씨의 ‘번역자의 후기’를, 그 뒤에는 생존 증언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고려독립청년당 당원’ 이상문(93, 광주 거주) 선생의 ‘전하는 말’도 실려 있다. 그야말로 ‘관계자 전원’이 등장한 셈이다. 

<적도에 묻히다>(역사비평사 펴냄)는 태평양전쟁 당시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파견되었던 조선인 군무원들의 이야기를 추적한 ‘역사 르포르타주’이다. 일제 패망 당시 조선인 군무원의 수는 육군 70,424명, 해군 84,483명으로 총 15만5000명 정도였다. 이들 가운데 남방에 파견된 소위 ‘포로감시원’은 총 3,223명이었다. 이들은 조선으로 끌려온 백인 포로들의 감시를 맡았고, 일부는 타이완, 인도네시아 등지로 파견돼 현지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했다. 당시 일제가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선발하면서 내건 조건-월급 30엔(전쟁지역수당 20엔 추가), 2년 계약 만료 이후 면서기 등으로 취업 보장 등은 당시로선 조선 청년들에겐 매력적이었다. 징병이나 지원병으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느니보다 돈도 벌고 신변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동남아 지역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포로감시원으로 근무한 조선인들


그러나 일제 패망 후 이들은 연합군이 주도한 전범 재판정에 서야 했다.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일본 군부의 거물급들은 ‘A급’으로 분류돼 대개 처형되었으며, 이들은 B,C급 전범으로 분류됐다. 군무원인 이들 ‘포로감시원’은 이등병보다 낮은 계급으로서 명령을 수행하는 것 이외엔 아무런 결정권도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연합군 포로 학대혐의로 네덜란드와 영국 전범재판소에서 모두 전범으로 처벌받았다. 재판 당시 이들의 신분은 일본인이었으나 일본으로부터 그 어떤 변론이나 신변보호도 받지 못했다. 이들은 일본에서는 조선인(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를 받았고, 한국에서는 친일파 비슷하게 인식돼 보호는커녕 버림을 받았다. 

이 책에는 일본군 포로감시원 출신 조선인 청년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이 된 사연이 소개돼 있다. 당시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있던 포로수용소에는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1400여명에 달했다. 1970년대부터 동남아 지역에서 근무했던 조선인 군무원들의 삶을 추적해온 저자 무라이 교수와 우쓰미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이 조선인 포로감시원 중 일부가 ‘고려독립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해 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 1월 4일 포로수용소에서 의거를 일으킨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들은 한동안 근거자료 미비로 항일투쟁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최근에 관련자 12명이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저자들이 조선인 포로감시원 양칠성(梁七星, 창씨명은 梁川七星)의 존재를 확인한 것은 1970년대 인도네시아에서였다. 당시 무라이 교수는 일본인 3명이 현지에서 ‘독립영웅’으로 추대된 1975년 당시 일본어 통역을 맡고 있었다. 무라이 교수는 그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한 일본인의 행적을 추적하던 중 그가 ‘양칠성’이라는 이름의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무라이 교수는 자바수용소에서 포로감시원을 지낸 조선인들의 단체인 ‘동진회’와 양칠성의 유족 등을 찾아다니며 추적에 나섰다. 양칠성은 1919년 전북 완주 출신으로 인도네시아로 간 것은 1942년이었다. 1942년 3월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기 전까지 인도네시아는 350년 동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하자 네덜란드는 일본에 빼앗겼던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다시 되찾으려 했다. 이에 양칠성은 게릴라부대인 ‘팡에란 바팍’(왕자부대)을 이끌고 네덜란드 군대와 싸웠다. 당시 인도네시아에 잔류했던 일본군도 네덜란드와의 전투에 참여했다. 양칠성은 1948년 네덜란드군에 체포돼 이듬해 8월 총살됐고 시신은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런데 당시 그와 함께 투쟁했던 인도네시아 동료들이 나중에 독립정부의 정부 요직에 오르면서 그를 ‘독립영웅’으로 인정해 1975년 그의 유해를 자바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이어 1995년 양칠성의 묘비에는 일본 이름이나 인도네시아 이름이 아닌 한국명 ‘양칠성’이 새겨졌다. 

▲ 네덜란드군에 체포돼 총살되기 직전 양칠성(왼쪽)의 모습 


한편, 저자들은 양칠성에 관해 조사하던 중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추가로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또 그들이 결성한 비밀결사체인 ‘고려독립청년당’의 존재도 파악하게 됐다. 고려독립청년당은 자바수용소의 조선인 포로감시원 이활(이억관), 김현재, 임헌근, 문학선, 이상문(생존), 손양섭, 조규홍 등 총 26명으로 구성됐는데 우두머리는 총령(總領) 이억관이었다. 이들은 동료 포로감시원의 탈출사건을 계기로 1944년 12월에 조직한 비밀결사체였다. 고려독립청년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아세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라.
2. 만방에 우리의 진의를 소통하고 유대할 수 있는 최단의 길을 가라
.
3. 민족을 위함이요, 조국에 이로운 행동이면 결코 주저하지 마라.




이들은 1945년 1월 4일 자바 암바라와군에 위치한 포로수용소 분소에서 거사를 일으켰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인 군무원들과 연합군 포로들에게 말레이 방면으로의 전속명령을 하달한 상태였다. 이에 손양섭, 노병한, 민영학 세 당원은 1월 4일 거사를 일으켜 수송트럭을 탈취한 후 포로수용소 소장과 일본인 무기상인, 군무원 등 12명을 사살하였다. 거사는 성공적이었으니 이들 세 당원의 비극적인 자살로 결말을 맺었다. 고려독립청년당은 세 당원의 거사를 제1차 거사로 규정하고 이어 제2차 거사로 포로수송선(스미레호) 탈취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 내에서 밀고자가 생겨 고려독립청년당 당원은 모두 체포돼 군사법정에 서게 됐다. 

일본이 패망해 물러가자 인도네시아에는 연합군이 상륙했다. 연합군은 조선인 군무원(포로감시원)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키로 방침을 세우고는 이들이 근무했던 포로수용소·억류소는 ‘조직적 테러단체’로 규정되었다. 결국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전범재판에 회부되었고, 네덜란드령 인도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조선인은 모두 68명(사형 4명), 영국군 주도의 싱가포르 법정에서는 6명(사형 1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전범 용의자로 붙잡히기 전에 극적으로 일본군을 탈주하여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투신한 조선인도 더러 있었다. 저자들은 초판 출간 후 30여 년간 이를 추적하여 이번에 한국어판 부록의 ‘추기’에 양칠성 외에도 최소한 7명의 조선인이 네덜란드와 대항하여 싸우다 죽어간 사실을 새로 밝혀내 기록했다.  

▲ 번역자 김종익 씨
민간인 사찰 피해자인 김종익 씨가 이 책을 번역하기로 결심한 것은 근자에 그가 겪은 일들과 무관하지 않다. 김씨는 “양칠성의 삶을 통해 국가와 권력, 그리고 개인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 전방위적인 사찰을 감행한 국가(공권력)의 불법성은 언론보도 및 사법부의 판결을 통해 입증된 바 있으나 그 누구도 그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김씨는 “상식이 통하는 시민사회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이라며 “양칠성의 삶에 내가 겪은 일들을 포개보면서 국가라는 추상적 실체가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따져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책은 일제하에서 이억만리 적도의 태양 아래 내동댕이쳐진 채 일본군의 앞잡이로 숨져간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곡’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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