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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45
5·18 학살과 헌정파괴의 공범들
 
김갑수 기사입력  2018/01/15 [22:23]

4.3과 5.18을 묻는 너에게(1)

2007년 11월 14일, 제주국제공항 4·3 유골 발굴 현장의 한 구덩이에서는 36구의 유골과 함께 두 개의 인장이 따로 발견되었다. 60년 어둠의 세월에 마모되어 희미해진 인장 하나에는 ‘희전(熙銓)’, 다른 하나에는 ‘양봉석 (梁奉錫)’이라고 각자(刻字)되어 있었다. 며칠 후 제주대학교 조사단은 1947년 제주도 대정국민학교에는 김희전 교사가, 의귀국민학교에는 양봉석 교사가 교편을 잡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안 잡힙니다. 유해가 옮겨지기 전에 형님께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습니다."

유골의 주인공 양봉석 교사의 아우 봉천씨(당시 60.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는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연합뉴스 2007. 11. 14)

제주국제공항에는 최소 500명에서 700명까지의 희생자가 암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에는 ‘정뜨르 비행장’이라고 불렸던 이곳에서는 1949년 2차군법회의 사형수 249명과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도내 예비 검속자 500명(추정) 등이 총살, 매장되었다고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이곳 말고도 다른 학살 현장의 증언도 부지기수로 줄을 이었다.

“군 트럭에 실려 온 주민 30여 명이 이곳에서 총살된 뒤 가릿당 동산에 암매장되었습니다.”
“화북국민학교에 집결해 있던 도피자 가족 중 일부는 학교 운동장에서 여자들은 트럭에 태워져 누러이(제주교대 남서쪽)에서, 남자들은 고우니모루 저수지에서 총살되었습니다. 그때 저수지 물이 핏빛이었지요.”


유족들의 증언은 각종 매체에 선연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들의 말을 취합해 보면 제주도 내 학살 현장은 66곳에 이른다. 희생자가 수만을 헤아리는 것에 비하면 66곳이라는 현장 숫자가 결코 많은 것은 아니다. 다랑쉬 굴, 애월읍 밭이오름, 현의 합장지, 제주시 화북천, 별도봉 동굴, 정뜨르 비행장(제주국제공항) 등이 대표적인 학살 현장이다.


이 대량 참극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로부터 해방된 둘째 해인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당시는 미군정 치하였다. 해방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그 해 3·1절 기념식에는 무려 3만의 제주도민이 참석했다. 당시 제주도는 전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지역이었다. 해방 후 이방을 떠돌던 6만 명의 해외 인구가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기념식이 파할 무렵 일부 군중들이 “통일조국전취”를 외치며 대로로 나섰다. 이때 난데없이 경찰의 총성이 울렸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이 무모한 발포로 인해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게 된다.

닷새 후인 3월 5일, 3·1 사건 대책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일제 때에도 전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이루어졌다. 제주도 전체 직장인의 95%가 참여한 파업이었다. 이것은 당시 군정의 사후 대책이 얼마나 미흡하고 부당했는지를 명백한 반대급부로 일러준다.


다시 일주일 뒤인 3월 12일에는 경무부 최경진 차장(경무부장 조병옥)이 제주 파업 사태를 언급하면서,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고 발언한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매카시즘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 동안은 다음에 벌어질 참상에 비한다면 그리 많은 희생자가 난 것은 아니었다. 당국이 어느 정도 단속과 선무(宣撫)를 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 내도(來島)한 서북청년단에 대한 불만이 차츰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1948년 3월 14일 모슬포 지서에서 청년 양은하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보고 받은 남로당 제주위원회에서는 ‘단정반대’의 행동목표와 ‘무장투쟁’의 행동강령을 최종 확정한다. 한편 제주도민의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이승만은 3월 28일, 방한한 미 육군성 드레퍼 차관에게 제주도를 미군 군사 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피력한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회합을 갖고 무장 투쟁 개시일을 4월 3일로 확정지었다. 급기야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제주도 남로당 무장대가 도내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을 습격한다. 이어 미 군정장관 딘이 극비리에 제주도를 방문했다. 직후 김정호 제주 비상경비사령관은 “밤 8시 이후 통행금지 위반자는 사살하라.”는 섬뜩한 명령을 내리게 된다.


5월이 되도록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미군 수뇌부는 “무장대를 총공격하여 사건을 단시일 내로 해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6월 2일에는 제주 주둔 미군 사령관 브라운 대령이 “제주도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다”고 밝힌다.

이윽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발했다. 도민들의 불안감은 적중하여 닷새 후인 8월 20일에는 800명의 경찰이 제주도에 증파되었다. 이승만은 법조문에도 없는 계엄령을 내려 무자비한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결과 사태는 일단 소강 국면으로 들어선다. 해안 5km 이상의 중산간 지대 마을이 모두 토벌의 표적이 되어 무도하게 가옥이 불살라지고 최소 1만2000명 이상의 주민이 다 죽어나간 후였다.

1950년 5월 30일에는 제주도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그러나 저간의 피해 양상은 실로 무참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시점에 도지사가 발표한 인명 피해자만도 3만 명에 이르렀다. 1,000명 이하에 불과한 무장대원을 진압하기 위해 수만 명의 양민을 무차별로 희생시킨 것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6일 ‘전 제주지구 예비 검속자 명부 제출의 건’이 제주도 경찰국장에게 하달된다. 이때부터 예비 검속자에 대한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게 된다. 주정공장 수감자들이 사라봉 앞 바다에 수장되고, 서귀포 관내 수감자 150명이 바다에 수장되었으며, 또한 제주경찰서 등지에 수감되어 있던 예비 검속자 수백 명이 제주 앞 바다에 수장되었다.


1950년 8월 19일 밤에는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500명 이상이 제주 비행장에서 총살된 후 암매장되었다. 8월 20일에는 모슬포 관내 수감자 252명이 군에 송치되어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집단 총살되었다. 아울러 섬이 아닌 목포형무소 수감 제주인과 대전 형무소 수감 제주인 300명이 여수 순천 관련자 700명과 함께 영문도 모르는 즉결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1950년 10월 10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잔류 예비 검속자가 석방된다. 이로부터 4년 후인 1954년 1월 15일 제주도 경찰국장은 잔여 무장대가 6명뿐이라고 발표한다. 이들이 마저 소탕된 1954년 9월 21일에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됨으로써 4·3사태는 7년 7개월 동안의 악몽 같은 장거리 터널을 외면상으로나마 벗어나게 되었다.


4·3 항쟁의 초기에는 남로당 제주위원회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월간조선>이나 극우단체들의 주장대로 제주위원회가 북과 연락되었다는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북의 지령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흑색선전에 불과한 것이다.


2007년 이명박 정부는 4·3 위원회를 해체했다. 이를 기화로 수구세력은 희생자들에게 또다시 빨갱이 덧칠을 시도했다. 설사 그들이 빨갱이라 하면 어쩔 것이냐? 죽은 이들을 찾아 진혼을 해야 하는 것은 보통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어두운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는 없다. 하지만 그 어두운 기억을 어떻게 규명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미래가 결정된다. 4·3 항쟁은 2차대전 후 처음 벌어진 세계 최대의 학살극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5,000년 역사 희대의 양민 학살극이기도 했다. 어두운 과거를 묻어 두는 자들에게는 어두운 미래가 대기하는 법이다. 주검의 산과 피의 바다, 남도 제주여! 부디 해원상생의 꽃으로 피어날지어다.

[1980년 5월 서울과 광주]

1980년 5월 18일, 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운동화 끈을 묶었다. 당시 나는 며칠 동안의 시간을 대부분 길거리에서 보냈다. 군사 반란자 전두환을 규탄하는 데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서울의 봄’이 도래했다고 하면서 연일 세 김씨의 사진과 화면을 냈지만, 그들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의 숫자가 급격히 준 지 오래였다. 대학생들은 이제 지난겨울 무슨 일이 있었으며, 전두환은 물론 노태우와 정호용의 이름 그리고 그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군대에 갔다 와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가을, 나는 박정희의 죽음 소식을 접했는데, 얼마 후 또 군인이 반란에 성공했다는 것은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 들렸다. 나는 고등학생 때 유신 선포를 처음 알았을 때와는 조금 다른 감정에 휩싸여 들었다. 유신 때에는 ‘박정희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하는 의혹과 공포의 느낌이었는데 비해, 전두환에게는, ‘이런 더러운 자식 ’ 하는 식의 선명한 경멸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나는 대학으로 돌아간 이듬해 봄부터 데모에 적극 가담했다. 데모만큼 실전이 중요한 일은 없다. 또한 데모만큼 실전에 의해 빨리 숙달되는 일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데모의 행동대로 나서면서, 왜 무기를 들지 않은 민중들의 봉기가 성공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페퍼포그라는 유독가스를 분출하는 장갑차가 가장 무서운 데모 진압 장비였다. 검은 장갑차량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안겼다. 하지만 여러 번 마주하게 되면 그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양임을 알게 된다. 일단 야구 방망이로 백미러를 까부수면 된다. 그러면 페퍼포그 차량은 더 이상 전진하지 않는다. 백미러가 없으면 후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마대걸레 자루와 티셔츠 조각만으로 가스 분출구는 쉽게 막혀 버린다. 나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이면 도로에서 페퍼포그 장갑차를 두세 대 무력화시켰다.

그 밖의 데모 진압 차량을 제지할 때 우체통은 차량 장애물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나는 편지의 송수신자들에게 지금도 미안하다. 진압 경찰들에게 돌을 던질 때에는 돌멩이가 방패 바로 앞에서 튕겨지도록 해야 한다. 영어로 말해서 ‘원 바운드 투석’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돌멩이 서너 개만 동시다발로 성공하면 소대 병력 정도의 진압대는 여지없이 전열이 흐트러진다.


최루탄이 날아올 때는 침착하게 주시해야 한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이 공을 끝까지 보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경찰이 아니라면 최루탄은 으레 포물선으로 발사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아스팔트에 착지하는 최루탄을 원 바운드 킥으로 되날려 보내는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사과탄이라는 이름의 근거리 발사용 가스탄도 있었다. 이것을 해치우기는 조금 더 쉬웠다.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헌옷이나 담요 조각 같은 것으로 기민하게 덮으면 된다. 그런 후에 대보름 불깡통처럼 길게 늘어뜨려 빙빙 돌리다가 진압대 쪽으로 되돌려 던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온 신무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공중에서 럭비공 튀듯이 거칠게 비행하면서 터트려진다. 우리가 ‘지랄탄’이라고 부른 그 신무기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인지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아마 계속 사용되었더라면 또 그에 대응하는 방식도 필경 나왔을 것이었다.


[괴기스러웠던 대학교수, “유신어른이라고 하세요”]

아무튼 그 때 며칠간은 군부 반란 집단의 위기였다. 수도의 중심 시가지가 거의 일주일 동안 시위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4.19 때와 흡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야말로 군사 반란자들을 몰아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단정했다.

한편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면서 곳곳에서 석연치 않은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일보>의 기사는 학생 시위를 걱정하거나 우려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마다 평교수협의회가 부활되었고 긴급조치로 밀려났던 해직 교수와 제적생들이 돌아와 민주화의 주도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대학의 교정은 바야흐로 데모 출정식으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노래와 구호를 번갈아서 부르고 외쳤다.

“여러분 ! 지금은 서울의 봄이 절대 아닙니다. 안개가 짙게 드리운 혼미 정국입니다. 권력에 알아서 기는 신문을 믿지 마십시오. 세 김씨는 이제 개털입니다. 박정희가 대가리에 총 맞아 죽은 지 불과 47일 만에 그의 충견들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가 하극상 군사 반란에 성공했습니다. 놈들에 의해 유신 연장 음모가 획책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나라의 민주화는 우리 손에 달렸습니다. 우리 다 함께 외칩시다. 유신 잔당 물러가고 전두환은 자폭하라!”


이어서 흘러간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 가 뜬금없이 터져 나왔다. 음악을 배경으로 박근혜와 비슷한 음성이 나왔을 때야 비로소 나는 그 배경음악의 의미를 알아 차렸다. “오옵하, 아버지의 원수를 가하파 주세요.”오빠는 전두환이었고 홍도는 박근혜였다.

나는 예상에 없던 감동을 하고 있었다. 지난 3년 간 군대에서 아침마다 복창한 ‘멸공구호’가 떠올랐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에 비한다면 지금 외치고 구호와 노래와 구호들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 들었다.


내 감정이 한껏 고조되고 있을 때 난데없이 촌극이 벌어졌다. 대머리 교수 한 분이 사회자에게 발언권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회자가 머뭇거리자 그는 마이크를 낚아채 버렸다. 대머리 교수의 얼굴에는 분기와 노기가 얼크러져 있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훈계를 하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교수님, 여기는 우리들의 토론장입니다.”
“알아. 그래도 내가 한마디 할 수 있는 거잖아?”
교수는 심한 경기 사투리 억양을 쓰고 있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라는 게 뭡니까? 반대 의견도 경청하는 거 아니우?”

곳곳에서 이런저런 고함이 터져 나왔다. 교수에게 발언권을 주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반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그 교수를 알고 있다는 기색을 보였다. 심지어 빨리 끌어 내리라는 과격한 외침도 있었다.

“저 또라이는 왜 또 나서는 거야?”
“문교부 장관 생각 있나 봐.”
“야, 니 연구실로 꺼져!”

학생들은 교수에게 반말을 넘어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입대하기 전만 해도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교수는 한사코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학생 여러분 !”나는 그 교수의 전공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00학과 교수, 000입니다.” “안다, 알어.”

교수는 정말 대학의 유명 인사인 듯했다. 그는 어떤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면 평소 야유에 아예 익숙해져 있는지도 몰랐다. “여러분의 주장은 정당해요. 하지만 지성인의 언어가 너무 상스러워요. 대가리에 총 맞아 죽다니요?”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교수의 유교적 훈계는 학생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좌중이 조용해진 것이었다. 아까 교수에게 발언권을 주자고 했던 학생들이 먼저 ‘정숙’을 솔선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숙한 가운데 한 학생이 아주 냉소적인 농담을 불쑥 던졌다.

“박정희가 대가리에 총 맞지 않았으면 복상사라도 했습니까?”그러자 절반쯤의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교수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어떻게 사람에게, 그것도 윗사람에게 자폭하라고 합니까? 자폭이 뭔지 알긴 해요? 그것은, 그것은...”


여기서 교수는 말을 끊었다가 정말 무섭다는 듯이 두 손을 턱 밑으로 모았다가,
“터져 죽으란 거 아니우?”라고 말하며 몸서리쳤다. 이번에는 사분의 삼 정도 학생들이 웃었다. 교수는 학생들의 웃음을 자신의 발언에 대한 동조로 인식하는 듯했는데, 그것은 나에게 대단히 이상한 일로 비쳤다. 하지만 용기를 얻었는지 교수는 절제 선을 넘고 있었다.

“또 유신 잔당이 뭡니까? 잔당이란 말을 알기나 해요? 그건 빨치산한테 썼던 말이라구요. 정 하고 싶으면 유신 어른이라고 하세요. 유신 어른!”


한꺼번에 폭소가 터졌다. 아까 교수에게 발언권을 주라고 했던 학생들도 모두 웃는 것 같았다. 혁대를 두 손으로 잡은 채 웃음을 참지 못하는 학생, 두 손을 뒤로 하여 땅바닥에 받치고 하늘을 향한 채 턱만 주억거리는 학생, 심지어는 건오징어가 불 위에서 보이는 반응과 비슷한 모션으로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웃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


통렬하게 웃고 난 나는 이게 결코 웃을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냐 하면 교수는 ‘진정’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그가 아닌 진정이었기에, 그리고 그 사람이 대학교수였기에 끝까지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저런 분들이 계시니까 전두환이 같은 양아치가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구나. 민주화는 생각보다 어렵겠구나.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대체로 이렇게 두려운 연상이 연쇄적으로 막막한 심중의 연기를 지피고 있었다.

교수의 발언을 끝내게 한 것은 학생 두세 명의 완력이었다. 그는 밀렸다가 끌렸다가 하며 갈지자로 우리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순간 나는 그 교수가 악질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불현듯이 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눈빛을 보면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 대머리 교수의 자취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결론 하나를 내리고 있었다. 최소한도 독재국가의 대학 교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더 이상 지식인은 아닐 거라고.


[우리의 약속은 ‘굿바이’가 아니었는데]

출정식을 마친 시위 대열이 잔디 광장을 몇 바퀴 도는 동안 참가 인원이 급격히 불어났다. 주동자 측의 확성기는 방관하거나 주저하는 학생들을 향해 ‘민주화의 파도’에 합류할 것을 종용했다. 나는 대열의 뒤를 따랐다. 나중에 경찰과 대치하게 될 때쯤이면 그 때 가서 맨 앞으로 나설 계획이었다.

우리는 정문으로 향했다. 며칠 간 계속 증가해 온 시위자 수는 그 날에 이르러 절정 선에 도달한 듯싶었다. 그런데 정문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굳게 잠긴 철문 밖에서 경찰이 학생들의 교외 진출을 막았는데 오늘은 확연히 달랐다. 경찰은 시위 학생들의 정문 진출을 방관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문 옆의 샛문은 열어 둔 채 그곳으로 시위대가 통과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마도 그 날, 모든 대학에서 이런 식으로 했기에 2,30만 명에 이르는 데모대가 서울 중심시를 점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광화문부터 시청 앞과 승례문, 그리고 서울역과 삼각지와 한강 인도교까지 시위 대열은 무섭게 불어나고 있었다. 이미 전 날 <조선일보>에는 학생 시위가 폭력화되어 진압 경찰이 죽거나 다쳤으며, 이런 사태가 계속될 경우 사회 불안은 물론 국가 안보까지 위협이라는 논평 기사가 보도되었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데모를 방치, 조장한 그들의 유인책에 학생들이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설령 젊은이들이 그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졌다 하더라도, 그들이 무서운 음모의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삼십 만 명의 피 뜨거운 젊은이들이 수도의 심장부를 점거하고 있는 이 시간만은 반란자들의 절체절명 위기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신축된 광화문에서 불과 50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앉아 있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경찰은 총력을 다 해 저지했지만 우리는 사투 끝에 저지선을 뚫었던 것이다. 그곳은 청와대의 목줄이나 다름없는 지점이었고 우리 뒤로는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다시 잡을 수 없는 기회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예상해 보았다. 이제 우리가 앞으로 더 간다면 반란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그들은 총을 쏘거나 아니면 도망칠 것이었다. 또는 일단 총을 쏴 보다가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때 우리를 직접 막고 있었던 사람들은 반란자들이 아니었다. 한국의 청년 경찰이거나 아저씨 경찰관들이었다. 그들이 끝까지 총을 쏠 가망성은 희박했다. 그렇기에 나는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던 것이다.

지체 상황이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하나도 없는 밤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각 대학의 대표가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의 결정을 기다리며 계속 노래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쳤다. 노래는 <아침 이슬 >과 <앞으로 앞으로 >와 <흔들리지 않게> 등이 주로 불렸다. 그리고 그 날 내가 한없이 외쳐 본 구호는 ‘독재 타도’였다 .


독재 타도’는 아주 그럴 듯한 음성효과를 내는 구호였다. 무성폐쇄음으로 끝나는 ‘독’과 다음의 유성자음 ‘재’의 조합 그리고 격음 ‘타’와 역시 유성으로 발음되는 ‘도’가 조합된다. 그리고 이 두 조합이 강렬한 대구를 이뤄 낸다. 게다가 처음의 ‘독재 타도’는 아주 낮고 여리게 시작했다가 갈수록 높고 빠르게 점층하는 과정에서 한껏 신명을 돋울 수 있으며, ‘독재’와 ‘타도’를 나눠서 주고받으며 서로의 교감과 동질감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최상의 투쟁구호였다.

대표자 회의의 결정이 발표되었다. 그들의 결정은 나의 모든 예상 중 어느 것 하나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 가지 안건을 놓고 약식으로 토론했다고 경과를 보고했다. 제 1안은 여의도 광장으로 가서 규탄대회를 한 후 해산, 제 2안은 현 위치에서 밤샘 농성, 그리고 제 3안은 우리의 의사를 알릴 만큼 알렸으니 일단 해산 후 관망한다는 것이었다. 결정은 제 3안으로 났다고 했다. 단 반란자들이 우리를 악용하여 계엄 확대 조치나 휴업령을 내리면 무조건 다음날 아침 광화문으로 다시 모이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그러면서도 웃었다. 제1안 때문이었다. 여의도도 물러날 거면 뭐 하러 이곳까지 왔냐고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아무튼 결정 사항과 사후 약속은 모두에게 철저히 알려야 했다. 시간이 들더라도 앞에서부터 뒤로 릴레이 식 구두 전달 방식을 쓰기로 했다.

“오늘은 이만 해산. 휴업령 내리면 다음 날 8시 광화문 집결.”약속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달되고 있었다. 얼마 후 대열의 끝까지 전달되었다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우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우리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자는 다짐 같았다. 우리는 모두 이산가족처럼 남녀 없이 얼싸안으며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며 다짐했다.

“광화문입니다, 광화문으로 모입시다, 광화문에서 다시 봅시다.” 그 날 우리 모두의 인사는 너 나 없이 이것이었다. 영어로 말해서 우리는 하나같이 ‘굿바이’가 아닌 ‘씨유 레이어’로 작별한 것이었다. 때마침 쏟아진 적지 않은 양의 소나기가 우리들의 열기를 삽시에 식혀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와 대학 휴업령이 내려졌다

[광화문의 풀은 바람보다도 빨리 누웠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휴업령은 내려졌다. 1980년 5월 18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화 끈을 묶었다. 집에서 광화문까지는 버스로 20분 거리, 나는 버스가 그곳까지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약속대로 2,30만 명이 한꺼번에 몰려들 터인데, 그러면 도로가 막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껏해야 종로 3, 4가쯤까지나 버스 타고 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날 나는 운동화와 어울리지 않게 양복을 꺼내 입었다. 혹시 검문을 받게 되면 대학생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을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예상과 달리 버스는 종로 시가지를 질주하더니 불과 10여 분만에 나를 광화문 바로 옆 종로1가에 내려 주었다. 나는 내 귀와 눈을 의심했다. 주위는 평소보다 조용했으며 넓은 교차로에는 거의 사람의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네거리 모퉁이마다 장갑차량과 무장 군인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나는 내가 약속을 잘못 알고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었던 시간과 장소에는 전혀 착오가 없었다.

나는 종각 뒷골목으로 걸어가 보았다. 힐끔힐끔 주변을 살피는 교련복 차림의 대학생 몇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나는 미국 대사관 쪽으로 앞서 갔다. 아무래도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또 다른 대학생 두셋이 차도 가까운 곳에 서서 마주 오는 우리를 무연히 보고 있었다.

나는 나지막하게 읊조려 보았다. “도옥재.” 그러자 교련복 몇이서 화답해 왔다. “타아도” 나는 약간 소리를 높여 불러 보았다. “도옥재” ~ “타아도” 순식간에 우리는 열 명 가까운 인원으로 불어났다. “독재타도 독재타도” 우리는 공포감을 이기기 위해 구호 복창의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는 차도로 나서 이순신 동상을 향해 발맞추어 뛰었다. 맞은 편 세종문화회관 골목에서, 그 위쪽의 녹지 나무 사이로, 아래쪽의 신문 가판대에서, 서너 명씩의 학생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독재 타도...” 어느새 우리는 독재와 타도를 나눠서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이순신 동상을 구호에 맞춰 몇 바퀴 돌았다. 뛰면서 나는 눈어림으로 인원을 헤아렸다. 이삼십 명 정도였다.

그때였다.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새로 지어진 광화문 쪽에서 족히 수천 명은 됨직한 무장 군인이 우리를 포위하기 위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각자 도망치자!” 나는 고함을 지르면서 시청 방향으로 튀었다. 무장 군인 대여섯 명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나는 군인들의 다리와 다리 사이로 다이빙하듯이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일어나 다시 달렸다. 순식간에 군인들을 따돌린 나는 광막한 시청 앞 광장을 내질러 달렸다. 아무래도 호텔이 안전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청 앞에 있는 프라자 호텔의 로비로 들어갔다. 두 손으로 양복 깃을 추스르며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커피숍은 광장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2층에 있었다. 의외로 광장은 평온하고 한가해 보였다. 모두가 잡혔을 것이었다. 체포되지 않은 건 나뿐인 것 같았다. “프레쉬오렌지쥬스!” 나는 다소 가격이 높은 음료수를 능숙한 어조로 주문했다.

그 날 집에 돌아온 나는 아주 간단한 메모 하나를 남긴 것으로 기억한다. - 만분의 일 - 그것은 광화문의 약속을 지킨 우리의 비율이었다. 나는 시구 하나를 추가했다. ‘풀은 바람보다 빨리 눕는다.’ 그러나 나는 광화문의 풀과는 달리 금남로의 풀은 바람보다 빨리 일어났음을 다음 날 알게 되었다. 이후 내가 광주 현장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적는 것은 구차한 일이라서 생략하련다. 어쨌든 나는 광주 현장에 가지 않았다.


아주 드물어지기는 했지만 요즘도 나는 악몽을 꿀 때가 있다. 그것은 시위 현장에서 나만 도망치는 꿈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다. 대단히 자기합리화적인 말이다. 심지어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이상한 말장난도 있다. 이런 말은 의도를 불문하고 1980년 광주에서 죽어간, 특히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했던 분들의 숭고한 선택을 경멸하는 것이다.


5·18 학살과 헌정파괴의 공범들 (2)

“목에 힘을 주고 패거리의 우두머리 같은 기질을 보이며 행세하는 전두환 소장은 정신 자세부터 정치적이었고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주지하듯이 5·18은 12·12 군사반란에 저항한 항거였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은 1979년 10월 26일, 놀랍게도 전두환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권 장악 공작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가 평소에도 정권 욕망을 가진 정치군인이었음을 알려주는 일이다. 위에 적은 전두환에 대한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평가도 이런 점을 뒷받침한다.


10·26 직후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자격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피격사망사건의 수사 책임을 맡았다. 그때 나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전두환 소장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전두환은 매우 신념에 찬 어조로 말했고, 발표 도중 단 한 번의 말실수도 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시종일관 박정희를 ‘각하, 각하께서’라고 호칭하는 것을 보며 왠지 모르게 전율하는 나를 발견했다. 전두환이 발표문을 넘기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 때는 순간적으로 차가운 광기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바로 저 자에 의해 이 나라가 10·26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겠구나’ 하고 직감할 수 있었던 직관의 정치인은 극소수였다.

전두환은 어떤 인간인가? 당시 주한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처음에는 전두환을 “지략과 추진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했다가 나중에 가서는 “신뢰할 수 없고 나쁜 짓을 예사롭게 하며 냉혹한 거짓말쟁이의 화신 같은 인물”로 간주하게 된다. 글라이스틴의 후임자 리처드 워커 대사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약삭빠르고 타산적이며 정략적인 사람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돈 오버도퍼, 『두 개의 코리아』) 또한 강준만은 “전두환의 타고난 유들유들함과 비위는 경이에 가까운 것이며 특히 사교성이 탁월하다”고 평가했다.(『한국현대사산책』)

전두환은 경남 합천 출생이지만 대구공고를 졸업하고 육사에 진학했다. 때문에 그의 기질과 캐릭터는 성장지 대구와 관련시켜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본다. 만약 전두환이 다른 지역 출신, 이를테면 좀 극적인 가정으로 그가 만약 광주 출신이었다면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군부파쇼집단의 왕초가 되어 대량 양민 학살을 자행하는 인물로 성장했을까?


1968년 조선의 124군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 당시 대대장이었던 전두환은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했다. 얼마 후 그는 대통령경호실 차장보로 발탁되면서 박정희와 자주 접촉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박정희는 자기가 죽기 8개월 전인 1979년 2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하고 당시 국내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던 청와대 경호실, 중앙정보부 등을 견제하도록 힘을 실어 주었다.

하지만 박정희와 전두환의 인연은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가야 한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에서 1년 간 민원비서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그때 박정희는 위관장교에 불과한 전두환에게 정치 입문을 권했지만 그는 사양하고 군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전두환의 군 생활은 시종일관 정치적이었다. 1964년 전두환은 노태우를 비롯한 소수의 육사 출신 장교들을 규합하여 사교 모임을 표방한 하나회를 결성했다. 하나회의 결성 명분은 단결과 애국심 고양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자신들의 출세에 있었다. 박정희는 하나회 멤버들을 총애하면서 고속 진급과 금일봉 하달 등 각종 특전을 베풀어 주었다. 물론 박정희가 피격 사망 후 반란으로 국권을 찬탈한 무리의 핵심세력은 바로 이 하나회 멤버들이었다.


‘정권 투쟁은 시체를 보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이 말대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죽음을 알자마자 정권 투쟁을 시작했다. 끝내 그는 권력 찬탈에 성공하고 박정희가 남긴 유신의 쓰레기를 연장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내심 그는 ‘박정희의 후계자는 바로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만약 박정희가 전두환에게 정치바람을 불어 넣지 않았더라면 5·18 같은 불행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서울의 봄’과 3金의 처신]

그 해 5월 어느 날, 기운 없이 집에 들어간 나를 보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김대중 씨가 빨갱이였을 리는 없을 텐데...” 주로 라디오만을 청취하던 아버지는 그 날 텔레비전 화면을 열어 놓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김대중의 얼굴을 배경으로 수도 없이 많은 김일성 배지가 줄을 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반신반의하고 계셨다. 그때 내가 아버지에게 느낀 것은 연민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내 기억에 그때의 아버지는 유달리 늙은 모습으로 간직되어 있다.


흔히 봄은 민주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당연히 이 계절 언어는 독재를 뜻하는 겨울의 상대어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기획된 봄’이었고 ‘음모된 봄’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민은 물론 정치 지도자들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12·12 군사반란은 비상계엄 하에서 전방 사단 병력을 빼내오는가 하면, 직속상관인 계엄사령관의 뒤통수를 쳐서 체포하는 등 국가안보와 군기를 주저 없이 무너뜨린 하극상의 극치였다.

서울의 봄은 이토록 교활하고 무도한 군인들의 각본에 따라 연출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최고 정치 지도자 3김, 즉 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신민당의 김영삼, 재야인사 김대중 중 어느 하나도 실상을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때를 따로 ‘안개정국’이라고도 하지 않았나.

사심을 가진 지도자들은 1980년 4월 14일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게 되었을 때에도 반란집단의 야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보안사령관으로서 이미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이 된 이유는 첫째가 돈 때문이었다. 돈은 정치를 할 때 필요한 것이다.


전두환은 현역 군인의 겸직을 금해 놓은 법률을 위배하면서까지 ‘서리’라는 딱지를 달아 중앙정보부를 차지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예산은 800억 원 정도, 실제로 전두환은 120억 원 정도를 빼내서 정치자금으로 유용한다.

김종필은 당사에서 기자들이 전두환의 중정부장 겸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철학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 있다”고 대답한다. 설악산에 놀러 간 김영삼 역시 “상관없다. 민주화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김대중만은 “전 장군은 이 나라의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나는 정보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매우 우려스럽고 다시 민주주의에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경고했을 따름이다.


위기를 느낀 김대중은 주로 특강을 통해 대중과 직접 접촉했다. 그 해 4월에서 5월 초까지 이루어진 6회의 특강 중 김대중은 4월 18일 동국대학 특강을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데, 그 이유는 9년 전인 1971년 박정희와 맞붙은 대통령 선거 때 100만 군중 앞에서 연설한 것도 같은 날짜 4월 18일이었으며 연설 장소도 동국대와 밀착된 장충단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1971년 고교생으로서 김대중의 장춘단 유세, 1980년 동국대 재학생으로서 동국대 특강 둘을 모두 들었다. 김대중은 논리와 유머를 섞을 줄 아는 탁월한 웅변가로 비쳤다. 다만 나는 동국대 특강에서 보조 연설자 고은 시인에게는 적잖이 실망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서울의 봄 시절에 정치권이 단합하지 못해서 전두환에게 빌미를 주었다고 한다. 과연 그런 것일까? 당시 3김 경쟁에서 아무래도 김종필은 약세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정치권 경쟁은 김영삼 대 김대중의 양자대결로 압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김영삼은 기존 야당 신민당을 장악하고 있었고 김대중은 재야 민주화 투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의 경쟁이 과열로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일례로 김영삼이 신민당 당직자들을 대동하고 충남 현충사를 참배하러 갔는데,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김대중은 재야인사들과 함께 현충사 인근의 윤봉길 생가를 방문하는 일도 벌어졌다.


김영삼은 김대중을 두 번 만나 신민당 입당을 권유한다. 이것은 요즘으로 치면 민주당이 한사코 안철수의 입당을 권유하는 것과 일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판에서 유력인사가 공개적이고 구체적인 옵션 없이 타당에 들어가는 것은 포수가 엽총을 버리고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짓과 흡사한 일이다. 김대중의 주변에는 하나같이 감옥에서 나온 민주화투사들이 있었다. 그들을 독재정권 치하에서 국회의원 직을 누렸던 신민당 사람들이 입당심사해서 받겠다는 식의 제안을 김대중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었다.

[3김씨와 무관했던 5·18]

강준만은 ‘서울의 봄’ 때의 양김 분열은 김영삼보다는 김대중의 책임이 크다고 말한다. 김영삼은 위기임을 몰랐지만 김대중은 위기라는 것을 알았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사리 분명한 강준만이 어떻게 이런 억설을 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세 가지 이유로 강준만 식의 주장에 반대한다. 우선 정치지도자로서 위기를 몰랐다는 점으로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아는 것이 죄가 된다는 상대적 논리도 성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이 알아야 할 자리에 오르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는 생각한다. 다음으로 김영삼의 민주화 투쟁이 혁혁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대중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설령 김대중이 양보했다고 하더라도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양김 분열의 상징처럼 돼 있는 1987년의 대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때 만약 김대중이 양보했더라면 노태우의 당선이 저지되고 김영삼이 집권했을 것은 거의 틀림없다. 하지만 김영삼이 임기를 마친 후 김대중에게 정권이 돌아갈 기회가 주어졌을지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5·17 쿠데타 3일 전인 5월 14일, 재야 지도자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이해동 씨 등이 김대중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연일 계속되고 있는 대학생들의 시위에 ‘고무돼 있었다’고 김대중은 회고하고 있다. 문익환 목사가 성명서를 내밀며 김대중에게 서명을 요구했다. 문 목사는 윤보선 전 대통령도 서명했다고 일러 주었다. 하지만 현실주의자 김대중이 보기에 그것은 엄청난 내용이었다.

모든 군인들은 무기를 놓고 병영을 나와라. 모든 노동자들은 해머를 놓고 공장을 떠나라. 모든 상인들은 문을 닫고 철시하라. 모든 국민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장춘단공원으로 모여라.

김대중은 서명을 거부했다. 그가 한 말은 “이 세상 다 살고 싶습니까? 도대체 목이 몇 개나 됩니까?”였다. 김대중은 왜 서명하지 않았을까? 좋게 보아 그는 평화적으로 민주화를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자기 주도의 정치적 방식이기도 했다. 비상시국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흔히들 하곤 한다. 김대중도 이 날 그런 말을 했다.


그런데, 빌미를 주지 않아서 도대체 얻은 것이 무엇이었던가? 빌미를 주었건 안 주었건 5·17은 기획되어 있었다. 김대중 말대로 자기가 서명을 하지 않아서 자기 자신은 물론 재야인사들이 다치지 않았던가? 김대중은 (내 아버지에게도 의심을 살 정도로) 용공의 수괴로 지목되어 사형언도를 받았다. 얻은 것이 뭐란 말인가? 빌미를 주지 않으려 하니까 오히려 빌미를 조작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투입시켜 광분하면서 유인, 확산시킨 것이 5·18 광주항쟁 아니었던가?

물론 김대중도 모진 고난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광주에 엄청난 빚을 지고 갚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박정희 기념관을 지었고 박근혜를 만나 지역감정 해소의 적임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오늘의 박근혜 대통령을 만드는 데 김대중의 일조가 일말이라도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김대중이 광주를 안 것은 ‘사태’ 이후 70일이나 지난 후였다. 김영삼은 가택 연금을 당했을 뿐이다. 김종필은 미국에 가서 보약과 골프로 세월을 보냈다. 바로 이 점에서 5·18의 주체는 단연 민중이 되는 것이다. 5·18을 민중항쟁으로 명명해야 할 이유는 당대의 정치 엘리트 3김 씨가 보인 다분히 정치적 처신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될 수 있는 일이다.

[한국 지식인들이 광주를 외면하는 이유]


우리는 5·18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좀 아는 체하는 것은 무지하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이다. 5·18에 공감하지 않으면서도 더러 공감하는 체하는 것은 불의하다는 말을 듣기 싫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대중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하는 말이다.
제가 가서 공부한 나라의 민주주의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정작 이 나라의 5·18은 외면하는 지식인들, 그들에게 프랑스혁명이나 명예혁명은 위대하지만 5·18이 전혀 위대하지 않은 것은 차라리 논리적이다. 독재에 반대하는 척하는 것으로 제가 민주주의자인 줄 아는 지식인들, 정치를 혐오한다고 말하지만 기실은 정치적인 지식인들, 이념을 백안시하는 것 같지만 자기도 모르게 이념에 종속되어 있는 지식인들, 그들의 뇌리에 광주는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5·18을 연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도 국제적이어서 마르크스·엥겔스를 탐독하고 레닌의 행적을 쫓으며 체게바라를 즐겨 인용한다. 그들에게 윤상원, 박관현이나 송기숙 등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왜? 기실은 알려하지도 않고, 이전에 공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5·18을 말할 때 김대중이나 ‘전라도의 한’ 따위는 빼먹지 않는다.

5·18은 신군부의 음모에 의한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 5·18의 발포 명령자는 전두환인가? 그렇다고 한다. 5·18은 미국이 방조, 조장했는가? 그렇다고 한다. 5·18 때 시신 암매장이 있었는가?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남아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식인들이 5·18을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심증은 풍문으로 희석되고, 풍문은 기껏해야 야담이나 야사로 구비될 따름이다. 역사로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5·18이 정사로 기록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을사오적을 규탄한다. 1905년 이 늑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 측 대신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들 말이다. 그들은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권중현(농상부대신) 등이다. 다만 참정대신으로 끝까지 반대하다 파면된 한규설이 있었다. 그는 일본정부가 주는 작위(남작)를 거절했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들은 5·17 폭거를 의결한 국무위원들을 일절 거론하지 않는다. 국무위원은커녕 최소한 저항 없이 대통령직을 넘긴 최규하, 국무총리 신현확, 국방부장관 노재현도 거론하지 않는다. 왜? 그들과 한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규설 같은 국무위원이 없었다는 것도 전혀 문제시하지 않는다.

5·17 당시 정무장관을 하다가 사표도 안 내고 20일 간 병원에 몸을 숨긴 고건이 있다. 훗날 나타나 “군사정권이 싫어서 그랬다”고 말한 고건은 이후 민정당 정권에서 9년 넘게 2개의 장관직을 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여간 해서 고건을 지탄하지 않는다. 지식인들은 위선자에게 약한 것일까? 아니 지식인들이 바로 고건 같은 위선자들이기 때문일 터이다.

5월 18일 08시, 약속을 지킨 것은 전남대 학생 100여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 싸운 광주시민들까지 하나같이 위대했다. 광화문, 서울역에서 굳게 약속하고 헤어진 수십만의 서울학생들, 그들은 5월 18일 08시 광화문에 나가지 않았다.


지금도 심재철, 유시민, 신계륜 등은 당시 학생 시위의 지도부였다고 자처한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말은 듣지 않았으면 한다. 당시 서울 거리에서 일주일 이상 지낸 나는 어떤 유인물 한 장 보지 못했고 그 누구의 연설 한 번 들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5월정신에 기대 장관도 하고 국회의원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들이 5·18의 이용자 또는 수혜자임을 지적하지 않는다. 왜? 그들과 한패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의 지식인들은 12·12 반란과 5·18 학살의 동시 주범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는다. 그 아래로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군사파쇼집단과 한패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악마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나]

“우리가 전남대학교에 처음 진주했을 당시 대학 교정 곳곳에 쓰여 있는 대부분의 구호는 붉은 글씨였다. 그 내용은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농민수탈금지’ 등. 필자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용공분자’의 활동이라고 믿었다. 1987년 이후 대학가에 나붙은 구호들이 붉은 색으로 쓰여 있고 북한의 주장과 동일한 내용이 게시되더라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내세웠던 정국이었던 만큼 대학가에 나붙은 ‘붉은 색 구호’는 그만큼 우리들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이것은 시위대가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씨를 석방하기 위해 시위를 했다 하더라도 굳이 붉은 색을 사용했어야 했는지, 게다가 ‘농민수탈금지’등 당시로서는 ‘용공’이라고 오해를 받을 일을 자초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글은 5·18 당시 특전사 3공수여단 12대대 소속 작전병이었던 김치년 씨가 남긴 수기의 일부다. 그는 이 글을 나름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글에서 ‘그들을 살인마로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지금까지 ‘광주 트라우마’로 자살한 인원이 40명을 넘는다고 한다. 결국 이들은 ‘2차 피살자’가 되는 것이다. 많은 인원 같은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상상을 단절케 하는 ‘그 여름 광주에서 있었던 일’에 비해 이것은 적은 인원이 아닌지. 그 중에 피해자는 물론 목격자와 가해자도 포함되어 있다. 이 점에서 명령에 따라 본의 아니게 진압에 참여한 군인들 역시 광주의 또 다른 희생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글을 남긴 김치년 씨는 특이하다. 그에게는 가해의식도 피해의식도 거의 없다. 두 가지 의식이 다 없으니 트라우마도 없는 게 당연하다. 그는 전역 후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다고 밝혔다. 대학원을 마쳤으니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어쨌든 수기를 다 읽어 보면 그는 스스로 자기가 나름 지식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를 이토록 대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전남대 교정에 도착한 그는 학생들이 써 붙인 구호가 ‘붉은 색’이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용공분자’라고 믿어 버렸다. 게다가 이것은 ‘시위대가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지금도(90년대 후반 시점)’ 생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농민수탈금지’ 구호를 내건 것을 ‘용공으로 오해 받을 일을 자초했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전두환, 노태우가 국가 반란범으로 지목된 탓에 자기도 덩달아 국가반란범의 부하로 전락된 점에 대해 유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묻거니와 무엇이 그를 이토록 대범하게 만든 것인가.

광주항쟁 당시 현장에 있었던 노인들은 특전사 군인들의 ‘악마적 행동’을 보며 “일제 순사도, 6·25 때 인민군도 저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광주 진압이 한국전쟁 때 ‘공산 괴뢰군’을 살상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음을 말해 준다. 결국 광주 진압은 여지없이 한국전쟁의 연장이었던 것이고, 그것은 ‘반공파시즘’이라는 ‘광기보다도 더 섬뜩한 광기’에 의해 대범히(?) 합리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서운 것은 수기의 주인공 김치년 씨가 여전히 반공파시즘의 논리로 공수부대원들의 행위를 정당화 또는 불가피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김치년 씨는 이 시대의 허다한 유형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광주 트라우마로 인한 40여 명의 추가 피살은 은폐된 소문으로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40여명이라니 많은 것 같은가? ‘그 여름 광주에서 있었던 일’에 비할 때 적다고 느껴진다면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으로 비극적인 역설이 아니겠는가?


광주 이후에도 숱하게 횡행해 온 이상한 것들, 우리가 문명사회에 속한다는 점을 회의하게 만드는 것들, 이를테면 장기수들에 대한 전향공작을 필두로 삼청교육대, 녹화사업, 성고문, 고문치사, 간첩조작, 서해교전, 천암함 등에 이어 오늘의 종북사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반공파시즘이라는 추상적 악마의 소행인 것이다. 단언하건대 이것이 살아 있는 한 우리에게 ‘우애와 화평’ 따위는 영영 찾아들지 않을 터이다.

[부언] 4.3에 관한 책으로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허영선 저) 등이 있고, 5.18에 관한 책으로 《5.18 그리고 역사》(최영태 외 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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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1/15 [22:23]  최종편집: ⓒ 폭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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