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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회주의자들의 항일투쟁 ③
봉오동ㆍ청산리 전투’와 ‘보천보 전투’
 
김갑수 기사입력  2017/07/15 [11:40]

‘봉오동ㆍ청산리 전투’와 ‘보천보 전투’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가장 유명한 두 전투를 들자면 1920년의 봉오동·청산리 전투와 1937년의 보천보 전투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봉·청 전투는 우파가 주도한 항쟁이었던 데 반해 보천보 전투는 좌파가 주도한 항쟁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흔히 봉·청 전투는 민족주의 세력의 성과이고 보천보 전투는 공산주의 세력의 성과라고 치부하는데, 나는 이런 관점에 이의를 가지고 있다. 두 전투의 주체는 좌우의 색깔에 약간 차이가 있었을 뿐, 기실은 둘 다 민족주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천보 전투의 주역 김일성이 민족주의자라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가 있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그렇다.”이다.

나는 내 소설 『압록강을 넘어서』에서 봉·청 전투를 대단히 중요하게 다룬 바가 있다. ‘봉오동과 청산리’라는 소제목을 달아 이 전투에 원고지 40장 분량을 할애했는데, 소설 서평을 쓴 어느 작가는 이 전투 장면이 내 소설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간도의 독립군 투쟁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세계 독립운동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승리를 역사에 남겼다. 외세의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군대가 제국주의의 정예군과 맞붙어 두 번씩이나 대첩을 이루어낸 역사는 다른 식민지 국가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2,200명의 병력이 5만의 제국주의 정예군과 맞서 3.300명을 사살한 봉오동 청산리 3차전 전투는 세계 식민지 항쟁 사상 전무후무한 독립전쟁이었다.”(졸저 『압록강을 넘어서』)

이처럼 봉·청 전투의 성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김일성이 보천보에서 올린 전과는 미약한 수준인 것이 사실이다. 아래 글을 읽어 보자.

“... 이 사건이 <동아일보>, <조선일보>등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면서 김일성의 이름이 알려졌다. 북한에서는 이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 중 가장 큰 업적으로 여기며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그러나 보천보는 순사가 5명밖에 없는 작은 마을(인구 1300여 명)이라는 주장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의 김일성이 참가한 전투라는 설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일단 이 글에서는 반격 출동한 일본군 부대를 괴멸시킨 김일성의 후속 전과를 누락하고 있다. 보천보 기습 소식을 듣고 급거 출동한 일본 헌병대와 오까와 부대는 압록강 대안 23도구 근처에서 김일성 부대와 조우, 교전하여 전사자 7명, 부상자 14명(일본군 통계)을 내면서 김일성 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기는커녕 도리어 혼비백산하여 도주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천보의 전과는 봉·청에 비하면 미약해 보인다. 그러나 보천보 전투에는 수치상 통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첫째, 1937년이면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이 발발한 때로서 우리 독립투쟁 기운이 약화돼 가던 때였다. 둘째 보천보 전투는 봉·청전투와 달리 ‘국내침공’이었다는 점이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보천보를 깎아 내리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보천보는 일본 경찰이 5명밖에 되지 않았던 작은 마을이었다. 그래서 보천보 전투가 ‘빈집털이’였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김일성은 보천보를 선택한 것일까? 보천보에서 20km 지점에 혜산진이 있었다. 혜산진은 당시 인구 1만 3,000명의 도시로서 압록강변에서 조선의 동안(東岸)으로 통하는 혜산선 철도의 종점이었다.

혜산진의 대안에는 장백부가 있었고, 마침 만주와 조선반도를 연결하는 혜산선이 전 구간 개통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므로 보천보 자체는 중요한 거점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지방의 요지인 혜산진의 ‘비상벨’과 같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이 습격당하면 그 소식은 순식간에 국내로 전해지도록 되어 있었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심리적 효과를 내는 것이 ‘최선의 유격대 전술’ 아닌가? 참고로 이 전투의 두 번째 공로자는 최현이었는데 그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을 지낸 최룡해의 아버지다.

‘봉오동ㆍ청산리’는 위대했지만 그 후과 또한 너무 컸다. 이후 우파항쟁세력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간도 출병과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사실상 해체되어 버리고 말았다. 반면 좌파항쟁세력은 보천보 이후에도 치열한 생명력을 이어갔다. 그들이 보천보 전투에 버금가는 간삼봉 승전을 일궈낸 것은 불과 4개월 후의 일이다.


“반드시 김비의 머리를....”

영하 40도, 김일성과 마에다의 한판승부

1937년 중일전쟁이 개시되어 일본군은 전선을 중국 관내로 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토벌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술책은 더욱 교묘해졌다.

일본군은 주민들을 집단부락으로 강제 이주시켜 유격대에 대한 지원을 차단했고, 전 방위 토벌과 특별귀순공작이라는 양면 작전을 구사했다. 특히 양정우부대와 김일성부대는 일본군의 주요 표적이었다.

유격대장들의 나이는 거의 다 젊었다. 1938년을 기준으로 위증민·임수산·박득범은 30세였지만, 조아범, 한인화, 진한장 그리고 김일성 등의 방면군 사령관은 26~28세였다. 영하 40도의 겨울, 산간에서 펼치는 게릴라전의 지휘관은 젊은 체력이 아니면 버틸 수가 없었다. 요컨대 만주 항일유격전에 ‘백마를 탄 노장군’같은 것은 없었다.

1940년, 날이 갈수록 항일 유격대들의 입지는 좁혀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에도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날카로운 항쟁을 이어가며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 토벌대에서는 마에다 중대의 명성이 가장 높았다. 이 부대의 지휘관 마에다 다케이치는, “김일성의 머리는 내가 베어들겠다.”라고 외치며 백두산 숲속을 거침없이 헤집고 다녔다.

이런 와중인 1940년 3월 11일, 김일성부대는 화룡현 홍기하에 있는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했다. 그곳을 지키는 삼림경찰대가 깊은 잠이 든 때에 들이닥친 유격대는 대량의 쌀과 탄약을 탈취하고는 곧바로 퇴각하여 지체 없이 80리 길을 퇴각했다.

마에다는 즉시 180명의 부하를 이끌고 김일성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눈 덮인 산야에는 발자국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유격대원들은 잠시도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다. 앉아서 밥을 먹을 수도 없는 그들은 생쌀을 씹고 눈을 집어 삼켰다. 대원의 절반이 동통으로 근육이 굳어지는 증세를 보였다.

이제 마에다의 추격을 따돌리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도망가지 못할 바에야 기다린다.”

유격대는 곧장 매복에 착수했다. 그대로 해가 기울어갔다. 이제 적이 올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뜻밖에도 5명의 일본군 특무가 출현했다. 유격대는 이 5명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이어서 적의 본진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진영의 거리가 100미터 이내로 좁혀졌을 때 김일성 사령이 권총 한 방을 터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전투는 한 시간 이상을 끌었고 적은 한 명의 도주자를 제외하고는 섬멸되었다. 물론 부대장 마에다도 사살되었다. 아군에게도 피해가 있었다. 정치부 주임 여백기등 몇이 부상을 당한 것이다.

이로부터 1년 후 일본군에서는 마에다 추모식을 거행했다. 마에다의 후임 세끼 경좌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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